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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점프 업 - 시카고] "같은 길 걸을 수 있어 기뻐"

예담한방병원의 정호윤 원장은 올해 30세다. 할아버지 정대영 원장과 아버지 정원조 대표 원장에 이어 한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은퇴를 했지만 현재 LA에서 환자들을 받고 있고 아버지는 2년 전 워싱턴 D.C.로 이전했다. 3대가 각각 동부와 서부,중서부 대표 지역에서 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정호윤 원장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의사로 일하시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진로를 결정하게 됐다. 3대 한의사가 좋은 점은 오랜 경험을 직접 보고 배우며 체험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과의사인 아버지 김영선 씨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김 씨의 2남중 장남인 김세현(미국명 알렉스)씨. 김 씨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는다. 일리노이대 시카고(UIC) 의대에 재학 중인 김 씨는 의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의사인 아버지가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을 무료로 도와주는 모습,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이 아픈 사람이 있으면 새벽에도 나가시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봤다”며 “어머니 역시 이런 분들이 집에 찾아와도 늘 웃는 얼굴도 맞이하는 것을 보며 나도 장래에 의사가 아버지와 같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지난 2008년 대입학력시험인 ACT에서 만점(36점)을 기록해 화제를 낳았다. 그는 “당시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다. 아버지와 같을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라며 “타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과 가까이 살고 싶어 UIC 의대에 진학했다”고 덧붙였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아버지와 농구경기로 풀었다는 김 씨는 힌스데일 센트럴 고교 재학시절 중서부지역 ‘제네바’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수차례 1등을 차지해 우승자들이 참가할 수 있는 ‘올림픽 디비전’ 피아노 경영대회에 출전했었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시카고] 외조부 뜻에 진로바꿔 3대째 한의사·장학사업

생물학 전공 '양의사' 되려다 한의사길 걸으며 봉사도 열심 사재 10만달러로 장학재단 12살 때 미국으로 이민 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할 때까지만 해도 이상인 원장의 꿈은 의사-이 원장은 양의사라고 표현한다-가 되는 것이었다. 생물학과를 거쳐 의과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당시 생각했던 이 원장의 진로였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인 오용섭 천암큰장학재단 이사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올해 나이로 아흔살인 오 이사장은 70년이 넘게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미국에서도 한의학이 양의학을 대체할 정도로 널리 알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외손자에게도 한의학을 권했다. 이 원장은 당시에 대해 “할아버지께서 당시 한의학과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하신 것을 건네시면서 한의학 전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할아버지의 생각이 옮았음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마이애미대학을 졸업하고 사우스 베일로 대학에서 한의학 석사를 마쳤으며 퍼시픽한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시카고한의사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지역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바 있다. 지금은 비록 직접 환자를 돌보지는 않지만 할아버지로부터 얻은 한의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환자를 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치료 과정을 설명하며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한의학이라는 점을 배운다. 이 원장은 아무래도 가족이 함께 근무하다 보니까 환자 치료와 관련된 사항들을 스스럼없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터득할 수 있었다 고 밝혔다. 현재 천암한의원은 시카고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인 로렌스 길에서 북서부 서버브 윌링으로 이전했다. 던디길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의 50% 이상은 타인종일만큼 현지화에도 성공했다는 평가다. 한의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던 환자들도 이 원장을 신비한 눈길로 바라본다. 이렇게까지 한의원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할아버지와 삼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원장은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한국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데도 열심이다.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타인종 환자에게도 한국산 김을 선물한 것도 같은 맥락. 김은 스시집에서 본 것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이 음식이 우리 몸에 어떻게 좋고 어떤 효능이 있는지 등을 설명했더니 큰 관심을 보였다. 물론 “맛도 좋다며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말하는 이 원장은 “결국 한의학을 통해 한국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설명했다. 시카고 지역 학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는 천암큰장학재단 역시 외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지난 2001년 설립됐다. 사재 10만달러로 기금으로 설립, 여기서 발생하는 이자로 매년 한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한의학과 신학을 선정한 이유는 자신의 몸을 치유하는 한의학자와 좋은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종교인이 되려고 하는 신학도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올해 39세로 1남2녀를 둔 이 원장은 자녀가 한의학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추천할 생각이다. 솔직히 한의사라고 하면 예전 어르신들은 침쟁이라고 부르며 널리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특히 미주 지역에서는 대체 의학으로 인정받으며 현지사회에서도 널리 전파되고 있다. 그 일을 이 원장처럼 3대째 한의학을 배우고 있는 한인들이 앞장서고 있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시카고] 감각·비전 부모와 공유 "세계시장도 우리 것"

'패션월드' 父 홍세흠 대표 - 子 홍지민 디렉터 '패리스 힐튼' 판매권 획득 지난 2008년 할리우드의 패션 아이콘으로 힐튼 호텔의 상속녀인 패리스 힐튼이 처음 선보인 헤어 관련 브랜드 ‘패리스 힐튼’의 론칭 기념 쇼가 LA에서 열렸다. 시카고 한인사회가 주목한 것은 이 론칭 쇼가 아니라 고급 패션 가발업체 패션월드(대표 홍세흠)가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대만의 판매권을 획득했으며 이 론칭 쇼를 통해 공식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홍세흠 대표는 “패리스 힐튼의 판매권 획득은 큰 딸 지민이의 작품”이라며 “현지사회 문화에 익숙한 지민이가 회사에 합류하며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현지사회 백인들에게 고급 패션 가발로 주목 받고 있는 ‘보헤미(Bohyme)’가 성공한 것 역시 지민의 역할이 크다”라고 칭찬했다. 홍지민 마케팅 디렉터는 “아버지가 가장 관심을 많이 두는 것은 제품의 질이다. 앞으로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제품의 질을 높이는데 노력하겠다”며 “아버지와 처음에 일하며 좀 어려웠다. 11년을 같이 일하며 이제 아버지로부터 비즈니스에 대한 것들을 많이 배웠다”고 밝혔다. '지니뷰티' - 3남매, 어머니와 '환상 화음' 시카고 북서부 서버브 나일스에 본사를 둔 지니 뷰티(회장 진안순). 시카고를 넘어 미주 최대 뷰티 서플라이 업체로 현지사회에서도 1위로 손꼽히고 있는 지니 뷰티는 진안순 회장을 중심으로 2남 1녀, 2세들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진안순 회장은 “어머니로서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지니뷰티를 성장시키는 것에 감사하다”며 “큰아들 스캇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마음이 착하고 스마트하다. 조지아 주립대(법학)-위스칸신 주립대 MBA 출신인 작은 아들 에디는 13년 동안 아버지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아, 아버지의 유업을 잘 받들고 있다. 막내 제니퍼는 코넬대학에서 경영과 법학을 전공했다. 언젠가는 오빠들과 손발을 맞춰 지니뷰티에 합세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막내딸 제니퍼 진(한국명 진선미)씨는 지난 해 6월부터 6개월 동안 UN의 컴퓨터 정보 기술개발을 위한 경제부서 단체인 ‘Global Alliance for ICT Development’에서 인턴쉽으로 근무하는 등 국제 경제감각이 뛰어난 수재로 알려져 있다. '비스코' - 명문대 출신의 세 딸 '든든' 연매출 3천만 달러 규모로 알려진 비스코 사 서병인 회장에게는 딸만 3명이다. 이들 중 장녀 줄리 씨는 예일대와 MIT를 졸업했다. 둘째 캐롤린은 브라운 대학을 졸업 한 뒤 각각 전문분야에서 일하다 현재 비스코에서 아버지를 돕고 있다. 막내 칼린 씨는 건축가로 시카고에서 활동 중이다. 1981년 설립된 비스코는 전문화된 기술로 3M 등 대기업을 비롯해 세계 치과 재료업계 회사들이 주목하는 한인 기업이다. 서병인 회장은 “딸들이 잘 커줬다. 전문직에 종사한 딸에게 비스코에서 같이 일할 것을 권했다. 딸들 역시 현지사회에서 충분한 전문분야 경험을 쌓은 뒤라 비스코 입사 후 빠르게 회사 경영에 큰 도움을 줬다”며 차기 비스코를 이끌 후계자로 딸들을 지목했다. '비 세일즈' - 2세만의 장점으로 승부 비 세일즈(회장 김용한)는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있다. 현재 뷰티 서플라이와 연관된 2만 개의 아이템으로 전 미국과 세계를 향해 사업을 벌이고 있는 비 세일즈의 애틀랜타 지점에는 김용한 회장의 아들인 하버드대(경제학 전공) 출신의 김유준 씨가 차곡차곡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김용한 회장은 “1세대로 내가 못하는 부분을 아들에게 기대하고 있다”며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들어오며 변하는 시대에 맞춰 회사를 젊은 만든다는 장점이 있다. 또 신세대의 추진력과 1세대의 경험이 하나 돼 현지사회를 넘어서 세계로 진출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다”고 말했다. 그는 “성실과 겸손을 기본으로 회사원들의 융합을 위해 그리고 고객들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모님을 이어 회사를 이끌 2세들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고 말했다. '채이드 패션' - 재단설립 봉사에도 앞장 채이드 패션(대표 김종구)은 장학사업의 일환으로 채이드 재단(이사장 김태민)을 지난 해 설립했다. 올 5월 첫 번째 사업으로 시카고남부 커뮤니티에 거주하는 타인종을 비롯해 뷰티업계 종사자 및 고객 자녀들을 대상으로 5만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김종구 회장은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재단을 설립했다. 앞으로 채이드 재단은 아들 김태민 이사장이 이끌 것”이라며 “이는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에도 남부 커뮤니티를 계속 지원하기 위한 약속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변호사로 채이드 재단을 이끄는 김태민 이사장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앞으로 더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장학사업 이외에 사회복지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커뮤니티에 대해 책임을 갖고 미래를 앞서가는 재단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2010-12-31

[2011 점프 업 - 애틀랜타] "위기 넘게 한 아들은 내 인생 최고의 파트너"

20년전 손난로 수입판매 대박…판매담당 횡령으로 위기 맞아 미국회사 다니던 아들 합류해 손난로 미 점유율 1위 만들어 영하의 추운 날씨에 찬바람까지 불면 따듯한 손난로 생각이 난다. 포장만 뜯으면 저절로 따듯해지는 일회용 손난로는 한인에게든, 미국인에게든 친숙한 상품이다. 월마트, K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나 월그린 등에서 손쉽게 찾아볼수 있는 이 손난로가 사실은 한인 업체에서 생산되고 있다. 미국 일회용 손난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히트맥스’(Heatmax, Inc.)가 바로 그 업체다. ▷보수적인 백인지역에 첫발= 히트맥스의 공장이 있는 곳은 카펫 생산지로 유명한 조지아주 달튼이다. 이 공장을 운영하는 한인이 바로 임창빈 회장과 아들 다니엘 임(한국명 민혁)씨다. 임 회장은 1958년 미국에 유학해 1964년에 조지아주 달튼으로 이주한 이후 46년째 같은 곳에서 살며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임 회장에겐 지금도 처음 달튼에 왔을 때가 눈에 선하다. “46년전 달튼은 그야말로 보수적인 남부 도시로 흑인조차 없는 백인들만의 도시였지요. 처음 이곳에 취직해 시내를 걸으면 모두들 동양인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서 뒤돌아 보곤 했죠.” 임 회장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이곳에서 카펫 재료를 개발해 주목을 끌었다. 아시아쪽의 인맥을 활용해 대형 카펫회사의 동남아 업무를 전담했다. 히트맥스의 설립 역시 일본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1990년 일본에 출장을 갔는데, 날씨가 무척 추워서 손을 비비고 있었지요. 그런데 일본의 동업자인 스기야마가 일회용 손난로를 주는 것입니다. 하도 신기해서 몇 상자를 샘플로 미국에 가져왔는데, 3개월만에 컨테이너 3개 물량이 모두 팔렸습니다.” ▷구원투수로 나선 아들= 성공을 직감한 그는 1990년 히트맥스를 설립하고 본격적 손난로 수입 판매에 나섰다. 그러나 3년 뒤 사업은 난관에 부딪혔다. 판매, 세일즈를 맡겼던 젊은 미국인 직원이 물건과 돈을 빼돌리기 시작한 것. 임 회장은 즉시 그를 해고했으나, 판매 담당이 사라지자 판로를 개척할수 없어 암초에 부딪혔다. 이때 장남 다니엘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는 당시 조지아 주립대학(UGA)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보험회사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일하고 있었다. 아들은 “내가 일을 잘못했는데, 네가 와서 회사일을 해다오"라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듣고 두말없이 합류했다. 아들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경영에 합류한 것은 1993년. “미국회사에서 일 잘하고 있는 아들을 부르기란 쉽지 않았다. 배신당한 뒤 믿을만한 파트너가 없던 내게 아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임 회장은 회고했다. 사업은 다니엘의 합류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본궤도에 올랐다. 그가 합류한 1993년부터 히트맥스는 일본 수입 대행 대신, 미국 현지 생산에 착수했다. 현지생산으로 물량이 확보되자 1995년 미국 전국에 손난로 판매를 시작했고, 월마트, K마트, 샘스클럽, 월그린 등 대형 매장에 납품해 큰 성공을 거뒀다. 현재 히트맥스는 미국내 일회용 손난로 시장점유율 1위이며, 히트맥스가 개발한 일회용 찜질팩은 특허를 얻어 시장을 의료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아들은 최고의 파트너= 임 회장은 “한민족과 유태인은 공통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특히 자녀 교육열은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다. 반면 유태인에게 본받아야 할 점은 기업을 일으켜 가족에게 물려주는 ‘대물림’이라고 지적한다. “유태인은 금융업, 지식산업을 대대로 이어받은 끝에 전세계적으로 막강한 하나의 경제·문화권을 개척했습니다. 중국 화교 역시 몇세대에 걸쳐 경제력을 모으고 굳혀 차이나 타운을 만듭니다. 머리 좋고 교육열 뛰어난 한인들이 이들처럼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한인 기업인들의 협동과 단결, 대물림을 위해 임 회장은 지난 2000년 세계한상대회를 설립하고 초대 및 4대 회장을 역임했다. 해외에서 장기간 거주중인 한인 사업가들이 지역 전문가로서 고국 경제발전의 교량 역할을 해야 하며, 아들 역시 그 대를 이을 것이라고 임 회장 부자는 다짐한다. “남들은 성공한 사업가라고 하지만, 저는 45년동안 회사를 29번 창업해 22번 실패해봤습니다. 그래도 매일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살라고 아들들에게 가르쳤고, 그런 실패의 세월을 같이 한 것이 바로 아들입니다. 이런 경험이 아들 손자들에게도 물려져 유태인, 화교에 이은 한상이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두 부자는 이미 대를 이어가는 한상의 모습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대를 잇는 비즈니스 철학 "미국서 성공하려면 미국인과 경쟁하라" 아들은 세계시장에 도전 임창빈 회장은 히트맥스를 20년간 운영해오면서 터득한 한가지 법칙이 있다.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한인 상대가 아니라,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미국인 사회를 상대로 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미주 한인 인구가 200만이면 미국 전체 인구가 2억5000만, 즉 125배입니다. 어차피 한인 시장이나 미국 주류시장에 파고들어가야 하는 노력의 크기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성공의 크기는 125배나 차이나는 것입니다. 단돈 5달러 짜리 손난로라도 125배나 큰 시장에 판매된다면 그 성공의 크기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히트맥스를 외국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 진출을 노리던 일본의 거대 제약회사 고바야시사가 지난 2006년 히트맥스를 거액에 매수한 것이다. 임 회장의 대를 이은 다니엘 임 대표는 이 기회를 통해 아버지의 철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공략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현재 히트맥스는 미국 손난로 시장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데 이어, 고바야시 사의 상표로 수출돼 일본 손난로 시장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중국, 싱가폴, 영국, 홍콩의 손난로 수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자와의 인터뷰 전날에도 일본에 급히 출장을 다녀왔다는 다니엘 임 대표는 “일본과 오랫동안 사업해온 아버지의 덕택에 세계시장을 공략할 힘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나라에 와서 생존하고 성공한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수 있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인물”이라며 “아버지의 지혜와 경험은 내 인생에 소중하며, 내 자녀들에게도 물려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종원 기자

2010-12-31

[2011 점프 업 - 워싱턴DC] "마이더스의 손…이어야죠"

말 안 통해도 기술은 통했다…한땀 한땀 최선 다해나갈 것 버지니아 라우든 카운티 덜레스 타운센터 쇼핑몰에 가면 ‘마법사’ 소리를 듣는 한인 재단사가 있다. 올해로 11년째 이곳에서 덜레스 커스텀 양복점을 운영하는 한기준(55)씨 2부자(父子)다. 35년 경력의 베테랑인 한 사장은 이민 초기에는 언어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술과 실력으로 승부를 건 결과 이곳에서는 황금을 만드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통하고 있었다. 지난 18일 쇼핑몰 입구 노른자위에 자리잡은 양복점을 인터뷰를 위해 찾았다. 작업장은 한 사장과 아내 귀순씨, 그리고 아들 상현(26)씨의 땀이 배어 나오는 곳이었다. 가장 고참인 한 사장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양복 자켓을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고 있었고, ‘중간급 기술자’인 아내 귀순씨는 중간 베테랑답게 드레스를 수선 중이었다. 양복 바짓단을 잘라내는 아들 상현씨의 손놀림도 능숙해 보였다. 한 사장 가족은 인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 “가정에 충실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1년전 버지니아주로 이민을 왔다. “기존 양복점을 인수한 게 아닌 우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맨 땅에 헤딩을 해야 했었어요. 고객층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첫 1년은 아예 매장에 작은 침대를 가져다 놓고 부부가 밤낮 교대로 일하며 고객을 확보했다. 고객과 깊은 대화는 안 통해도 기술은 통했다. “손님들이 옷 수선이나 맞춤 양복을 보고서는 마술이라며 놀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이민 정착 무기가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오게 된 것 같아요.” 3년 전부터는 경찰의 꿈을 안고 대학에서 형사정책학을 전공한 아들 상현씨가 가업을 잇겠다며 돌연 진로를 바꿨다. “떼 돈을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성실하면 미래는 충분히 보장된 비즈니스라 아들이 해보겠다고 했을 때는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했습니다. 컴퓨터가 아무리 발전해도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옷을 입고 사는 동안 이 업종은 사라질 수가 없죠. 아들에게도 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는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들 상현씨도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 손재주는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아버지처럼 되는 게 꿈입니다. 지금은 빨리 기술을 배우는 게 첫 번째 이고요.” 한 사장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함이었다. 직업뿐만 아니라 미국 정착 이래 첫 보험사, 이발사 등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다. 이런 그의 성품은 얼마 전 쇼핑몰 측과 10년 임대 재계약을 맺을 때 빛을 발했다. 보통은 입점 매장들이 몰 폐장 시간인 오후 9시 30분까지 영업을 해야 하지만 한 사장 매장만 유일하게 오후 7시까지로 단축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은 변호사를 써도 힘든 일이거든요. 지금까지 몰 측과 쌓은 신용이 큰 힘이 됐습니다. 살면서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들 부자의 꿈은 앞으로도 고객의 옷을 만들고 고치는 한 땀에 최선을 다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마당 뒷 뜰에 재배하고 있는 온갖 과일나무와 각종 야채 등도 작은 기쁨이다. 최근에는 시집 간 딸이 손주를 선물로 안겼다. 또 직접 기른 배추로 얼마 전 100포기 이상 김장을 하기도 했다. “세상은 약삭빠른 사람이 당장의 이익을 얻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이 결국엔 승자인 거 같아요. 앞으로 아들도 ‘마술사’ 소리 듣는 재단사로 키워내면서 이렇게 살고 싶어요.” 이성은 기자

2010-12-31

[2011 점프 업 - 워싱턴DC] "3대 가업…명의 꿈 꿉니다"

어려서부터 침·한약은 친구…무료치료 봉사 아버지 존경 가업을 잇는 대물림은 전통과 경험을 중시하는 한의업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워싱턴 일원에서 성업중인 100곳 가까운 한의원 가운데서도 3,4대째 가업을 이어온 한의사들이 눈길을 끄는 이유다. 오랜 세월 대를 이어 한의를 연구하고 의술을 펼쳐온 이들에게서 신뢰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버지니아 애난데일에 위치한 한일한의원 연태흠 원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에 중독 됐을 때 아버지 연규석씨에 의해 목숨을 건진 것이 진로를 선택한 계기가 됐다.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급히 침과 한약으로 치료를 해주셔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나중에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내가 해결해야 겠다는 것이었죠. 그 결심을 마음에 품고 자라서인지 자연스럽게 한의학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어린시절엔 할아버지집에 가도, 집에 있어도 늘 한의원이었기에 ‘이런게 내 운명이구나’ 하기도 했다는 그. 집과 한의원이 같은 건물에 있어 한의원이 집과도 같았고 아픈 환자들이 치료를 받은 후 고마워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발견했다. 특히 한밤중에 경기를 하는 어린 아이가 한의원을 찾아왔을 때 아버지가 침착하게 치료하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그는 말했다. 연 원장의 형은 서양의학을, 차남인 그는 한의학을 택했지만 결국은 사람의 생명, 건강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경험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의학에서 전통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며 “서양의학의 경우 데이터로 통계를 내고 똑같은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있지만 한의학에서는 환자의 체질 등을 토대로 치료법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경험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그는 여기에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첨가시킴으로써 경험 의학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새로운 치료법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 원장은 “75세를 넘어가는 아버지가 지금도 한의원을 운영하며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신다”며 “한의학만이 100% 완벽한 의학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의 방법에 늘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정말 존경스럽다”고 전했다. 그는 또 “혹시 자녀가 또 다시 가업을 이어 한의사를 한다면 일단은 개인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다”면서 “나를 보고 자란 아이들도 이 길을 걷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고 말했다. 연 원장은 상해중의약대학 5년을 졸업, 대학 부속병원에서 4년간 연수했으며 부친이 운영하는 한일한의원에서 다년간 부원장으로 일했다. 상해중의약대학 골상과 3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부속병원 서광의원 골상과 특진부 3년 임상경력이 있다. 한편 최근 국립보건원(NIH)이 발표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응답자 7만5000여명 중 약 38%가 지난 2007년 한해동안 건강을 위해 대체 의학에 의존했다고 답했다. 이들이 소비한 금액은 총 339억달러에 달하는데 이중 강좌, 건강 식품 섭취 등 스스로의 건강 관리에는 148억달러, 또 한의원, 마사지 테라피스트, 척추신경병원 등에 소비한 금액은 119억달러로 조사됐다. 특히 한의원과 척추신경병원은 연간 무려 3억5400만명이 찾는 등 대체 의학에 대한 미국인들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승림 기자 ysl1120@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워싱턴DC] 아버지의 열정·추진력에 미래비전 '젊은 피' 더했다

미국내 최대 동양식품 유통사 창립 35년만에 2세 경영체제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고 특히 겸손합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 회사 운영은 아마 나보다 더 나을 겁니다.” 경기 불황 등 각종 비즈니스 악조건을 뛰어넘고 30여년간 ‘식품’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미국내 최대 동양식품 유통사인 메릴랜드 하노버 소재 리브라더스 이승만 회장(73). 지난 2009년부터 착실히 경영 수업을 쌓고 있는 아들 이라빈(35) 상무를 옆에 두고 칭찬이 끊이질 않는다. “76년 리브라더스를 시작한 뒤 지금껏 내 입맛을 거치지 않고 시장에 나가지 않은 품목이 없습니다. 식품의 특성상 직접 맛을 확인했고 몸으로 뛰었지요. 하지만 그 동안은 이러한 경영이 통했지만 앞으로는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요.” 국·내외 5개의 계열사와 미국내 11개 매장, 1600개의 도매 어카운트, 리브라더스 또는 아씨 등의 자체 브랜드만도 4000여 가지에 이를 정도로 명실상부하게 식품 왕국을 건설한 그. 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이 젊은 피를 필요로 했다.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향후 30년을 내다보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태어나 워싱턴 일원 명문사학인 조지타운 프렙을 거쳐 뉴욕대에서 마켓팅과 인터내셔널 비즈니스를 전공한 둘째 아들 이라빈 상무. 그는 지난 2001년 리브라더스의 서부 전초 기지인 코리안 팜을 통해 이버지 사업에 뛰어든지 10년만에 본격적인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됐다. 이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은 굳건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 밖에 모르던 아이가 여기서 일하려고 한국말을 배우는 등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더라구요. 아직 고생하는 것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법 믿음직해요, 나보다 더 잘할 겁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도 남다르다. “이버지는 누구보다 열정(passion)과 추진력(drive)이 강한 분이시죠. 힘들때 마다 그 벽을 넘어서는 방법도 알려주셨구요. 특히 돈을 벌면서도 30년간 이사 한번 없이 한 집에서 살아가시는 검소한 모습이 바로 제 자산이기도 합니다.” 2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부자가 딱히 우려하는 부분도 한가지 있다. 바로 세대차다. 이 회장은“ ‘세대차(generation gap)가 가장 걱정스럽다”면서도 조금씩 양보를 통해 줄여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라빈 상무는 “ 부모와 자식간에는 세대차와 더불어 이민 1세와 2세들은 문화차이도 존재하고 있다”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고 어려움”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향후 30년을 바라보는 미래 비전에 대한 생각은 일치했다. 미주 한인 시장을 넘어 이제는 실질적으로 인터내셔널 기업으로 성장하고, 미 주류 식품회사들과 승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구매선을 더 다각화 하고 브랜드화를 통해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스코와 웨그먼스 진출이 그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최근 극심한 경기 불황을 비롯 지난 30여 년간 부침이 심한 기업 환경 속에서도 매년 10% 이상 고속성장을 이루어낸 이 회장은 불황은 또 다른 도약의 디딤돌이었다고 말했다. “저에게 불황은 없었습니다. 다른 기업이나 경쟁자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몸을 움츠릴때 우리는 과감한 돌파로 성장했습니다. 불황은 경쟁자들을 퇴보시키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IBM이나 소니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제는 삼성과 애플에 그 지위를 내줬듯이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는 이라빈 상무도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기업은 비즈니스가 계속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한 기업들이라며 리 브라더스가 앞으로도 식품사업을 계속 하겠지만 어쩌면 다른 분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1세인 아버지가 닦아 놓은 가치와 자산 위에서 회사를 이끌어 가겠지만 기업은 변화를 통해야 한 단계 성숙해 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초래 하듯 아버지의 말처럼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가겠다”고 말했다. 허태준 기자

2010-12-31

[2011 점프 업 - 워싱턴DC] 한인사회 1.5세 시대 열렸다

워싱턴 한인사회가 변하고 있다. 변화의 중심은 역시 세대교체다. 한인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젊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40여년간 1세들이 주름잡던 한인사회에서 그 동안 간간히 모습을 비추기만 하던 1.5세들이 어느덧 한인사회의 주류로 성장했다. 1.5세들은 그 여세를 몰아 최근 들어서는 잇달아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한인회장을 비롯 각 직능단체들을 이끌고 있다. 한인사회가 말로만 외치던 주류 사회와의 교감, 직접 소통이 일상 생활로 다가섰다. 세대교체의 바람은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한인회가 중심이다. 그동안 일부 한인 회장에 1.5세들이 등장, 바람을 몰고 오긴 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1.5세들의 발걸음이 거세지고 있다. 워싱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워싱턴 한인연합회. 35대를 이어오면서 1세들의 전유물이었던 연합회에 40대인 최정범(48, 사진)씨가 나서 무투표로 당선됐다. 새해부터 임기 2년의 활동을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인 지난 1974년 도미했다. 현재는 백악관을 비롯 의회 등 미 정부기관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는 등 성공한 비즈니스 인으로도 꼽힌다. 한인사회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문제가 첨예하던 지난 2008년 워싱턴 독도수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인상적인 활동을 펼쳤다. 비즈니스를 통해 일군 네트워크를 한인사회와 접목시킨 것이다. 최정범 회장은 “1.5세는 1세와 2세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서 “1세들이 세워논 길 위에 2세들을 이끌면서 좋은 모습을 만들어가겠다. 이는 시대적 사명”이라고 말했다. 2세 조직을 꾸리기 위해 전 보스턴 시의원을 역임한 샘 윤 씨를 부회장으로 영입 하는 등 한인회 조직도 젊게 꾸려가고 있다. 버지니아 한인회 홍일송 회장도 1.5세에 가깝다. 올해 47세인 홍 회장은 1978년 도미 메릴랜드대를 수료했다. 그는 “1.5세들은 1세들의 초기 정착 과정을 지켜봤고 2세들과도 교류한다”면서 “양 쪽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홍 회장은 특히 “주류와의 소통은 늘상 해 온 일이었다” 면서 “1.5세의 한인회는 한인 사회의 발전과정”이라고 강조했다. 한인회와 더불어 워싱턴 일원 직능 단체들도 이미 1.5세로 넘어가고 있다. 체육회가 두드러진다. 워싱턴 축구협회 손태성 회장(55)을 비롯 메릴랜드 체육회 이창훈 회장(40), 워싱턴 야구협회 샘 정(48) 회장 등이 그들이다. 또한 워싱턴식품주류협회 차명학 회장을 비롯 워싱턴 한인봉사센터 헤롤드 변 이사장 등도 1.5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이에 앞서 워싱턴 한인사회에서는 전 워싱턴 상공회의소 손영석 회장을 비롯 메릴랜드 식품주류협회 및 전국 식품주류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현주 회장, 메릴랜드 한인회를 거쳐간 한기덕 회장 등이 이미 1.5세의 토대를 닦아 놓기도 했다. 1.5세들의 진출은 필연적이기도 하다. 워싱턴 한인사회의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1.5세, 2세들의 성장과 더불어 1세대들이 고령화로 한인사회 전면에서 자연스럽게 퇴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스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려의 목소리도 여전하다. 1.5세 한인회장 시대를 먼저 열었던 한기덕 전 메릴랜드 한인회장은 “1.5세대는 1세와 2세들의 교량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지만 마음과 나이만 젊다고 다 1.5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5세들이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성실함과 함께 행정 및 재정의 투명성이 선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명성이 없는 리더는 무늬만 1.5세로 한인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일부에서는 또 한인사회의 외연을 넓히는 역할과 함께 1세들이 이룩한 토대를 잘 보듬어 갈 수 있는 조정자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허태준 기자

2010-12-31

[2011 점프 업 - 샌프란시스코] 뒷마당 텃밭을 600에이커 농장·마켓으로 일궈 내

근면·성실 하나로 맨땅서 우뚝 아들은 의사 꿈 접고 농학 전공 자부심 갖고 농가명문 이룰 것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싱싱한 야채를 지역 한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마켓까지 냈다. 농사일은 물론이고 마켓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내친 김에 또 하나의 마켓을 세웠다. ‘김스 농장’‘산타클라라 교포 마켓’‘산타클라라 슈퍼교포 플라자’를 일군 김창대(71)·스티브 김(한국명 성욱·43) 부자의 이야기다. 교포마켓과 슈퍼교포 플라자는 김스 농장에서 직접 경작한 상추·깻잎·미나리·파 등 신선한 한국 채소 판매해 꾸준한 명성과 인기를 이어오고 있다. 1세대인 김창대씨는 1980년부터 30년째 농사를 짓고 있으며 아들 스티브 김씨는 1994년 교포마켓을 연 이후 2대째 ‘농업과 마켓 경영’을 대물림해오고 있다. <편집자 주> ‘너무도 하기 싫던 농사일 돕기’ 스티브 김씨의 가족들은 김씨가 7살이던 1975년, 경남 진주시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 당시 김씨의 아버지는 6·25 전쟁 후 한국의 어려운 경제, 불안한 정세, 자녀의 미래와 교육 등에 관해 고심하다 이민을 결정했다. 처음 도착한 알라바마주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해 그 후 1년 만에 버지니아로 이주를 거치며 힘든 정착 시기를 보내던 중 1977년, 지인의 권유로 김씨 가족은 캘리포니아주에 첫 발을 내딛었다. 김씨는 당시 부모와 5남매가 작은 이사트럭 하나로 일주일이 넘는 미 동서부 횡단 ‘대장정’에 올랐던 기억에 대해 “지겹도록 가도 끝이 안보이던 것과 트럭 타이어가 빠져 온 가족이 고생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캘리포니아주로 이사온 후 김씨의 아버지는 샌호아킨 밸리 농장에서 토마토, 포도밭 등의 고된 노동 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 당시 고된 노동 중에도 김씨의 아버지는 한국과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가족들을 위해 뒷마당에 작은 텃밭을 일궈 깻잎, 상추 등을 길렀다고 한다. 텃밭의 규모와 채소 재배량이 식구들이 먹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 늘어나자 김씨 아버지는 장을 보러 다니던 몬트레이지역 한인 마켓에 채소를 갖다 놓기 시작했다. 채소를 주고 식료품을 가져오는 일종의 물물교환 방식이었다. 하지만 신선한 한국 채소는 지역 한인들의 입 소문을 타고 금새 인기를 끌었고, 주문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김씨 아버지는 내친 김에 본격적으로 채소를 경작하기로 결정했다. 김씨 아버지는 1980년 중가주 털락 지역에 19에이커(2만3000평) 규모의 토지를 구입해 농기구 하나없이 삽 하나와 손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스 농장’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에는 물을 댈 변변한 호스조차 없어 온 가족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나르며 농사를 도왔다고 했다. 그 시절에 대해 김씨는 “철없던 나이에 농사일을 돕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귀찮았는지 모른다”며“다른 친구들은 방과 후 어울려 놀고 스포츠도 즐기는데, 나만 농사일을 도우려 집에 가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가끔 감기 몸살 등으로 몸이 아파 학교를 못 갈 지경이었는데도 집에서 일을 돕는 것 보다 나을 것 같아 끙끙거리면서도 학교엘 갔다”면서 “덕분에 우리 5형제 모두 매년 개근상을 받았다”며 껄껄 웃었다. ‘교포 마켓 문을 열다’ 김씨 가족의 채소는 몬트레이에 있는 6개의 한국 마켓에 조달됐고, 주문량은 점점 늘어 샌프란시스코, 산호세는 물론 LA까지 확장됐다. 당시 배달을 담당했던 김씨는 수금이 제대로 안되거나 물건값을 터무니없이 깎는 등 골머리를 앓는 일들이 잦았다고 했다. 김씨는 가족들과 함께 오랜 상의 끝에 직접 소매점을 열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1994년 6월, 직접 재배한 신선한 채소를 중심으로 한국 식품을 공급하는 ‘교포마켓(구 교포시장)’이 문을 열었다. 2008년에는 교포마켓으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진 곳에 2호점인 ‘슈퍼교포 플라자’를 세웠다. 두 마켓은 모두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대만 등 타커뮤니티 소비자들에게까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한류 열풍과 함께 한국 음식의 인지도가 높아진 덕분에 현재 두 마켓을 찾는 타커뮤니티 주민은 전체 소비자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농자는 천하지대본’ 김씨는“현대인들의 생활이 바뀌고 인터넷, IT사업 등이 발전한다 해도 농업이 모든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사실”이라며 “지금의 교포 마켓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조금씩 다른 형태와 컨셉을 띠게 된다해도 그 중추가 되는 농장 일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내 한인들의 입맛이 점차 변해가고 세계화됨에 따라 한국 채소, 한국 식품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것이 김씨의 의견이다. 김씨는 변해가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 앞으로 다양한 종류의 미국 채소도 경작할 예정이며, 특히 건강 식품에 소비자들의 관심이 많이 쏠리고 있는 요즘 트렌드에 맞춰 유기농 야채 재배도 계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업 잇는 대물림은 계속된다’ 김씨는 학창시절 생물학에 관심이 많아 생물학자나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그러나 “일단 하고자 마음먹은 일에 대해 평생 묵묵히 이뤄 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며 “점차 마음을 바꿔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가주 주립대(세인트루이스 오비스포)에 진학, 농업공학(agricultural engineering)을 전공했다. 농업 경영, 회계 등을 배우며 농업과 마케팅에 관한 전반적인 기반을 다졌다. 김씨는 “처음 마켓을 열었을 당시 지금보다 한국 말도 서툴렀고, 매장에 바코드 스캔 시스템도 없어 모든 데이터를 ‘어려운’ 한국 말로 정리해가며 매일 저녁 12시까지 수작업 하는 등 고충이 많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신선한 채소를 찾는 손님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도 커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끊임없는 도움과 격려가 있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올해로 교포 마켓은 개점 16년을 맞았고, 김스농장도 확장을 거듭해 이제는 길로이·센트럴 밸리·베이커스 필드에 걸쳐 총 600여 에이커 규모의 농장에서 배추, 무, 깻잎, 쑥갓, 미나리, 풋고추, 오이, 호박, 가지 등 신선한 채소와 갖가지 과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현재 김씨의 형과 남동생도 아버지의 농장 일을 꾸준히 돕고 있다. 김씨는 “그저 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으로 마켓을 꾸려왔지만 요즘 들어 가업을 이어간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자부심이 든다”며 “내 자녀, 내 손주들이 계속 가업을 이어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1세대가 열심히 일궈놓으면 2세대는 흥청망청 즐기고 3세대쯤 가면 쫄딱 망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우리 집안에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을 것”이라면서 “아버지께서 일궈 놓으신 터전을 내가 더 열심히 가꾸고, 내 후손들이 더 발전시켜 관련업계의‘명문 집안’이 되도록 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양정연 기자 jyang@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뉴욕] "대대손손 한국 대표음식 손맛 알리고 싶어요"

타인종에 건강식 마케팅 주효, 유명 식당·마켓서 주문 잇따라 어릴 때부터 김치 자부심 대단…젊은 감각 더해 새 도약 준비중 뉴저지 잉글우드에 있는 ‘아리랑 김치’ 사무실 겸 조리공장. 진입로에 서 있는 큰 간판에는 ‘GABOH inc’라는 업체 이름이 눈에 띄게 새겨져 있다. ‘아리랑 김치’를 만드는 김치 업체 이름이 ‘가보(家寶)’라니, 초행길에 알게 된 회사 이름이어서 약간 의아했다. 남편 오시정(64)씨와 함께 30여 년 동안 ‘김치’라는 한 우물만 파온 창업자 오경순(60)씨가 궁금증을 풀어줬다. “대대손손 ‘참 김치’를 미국과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의미에서 회사 이름을 ‘가보’라고 지었다”는 설명이다. “다행히 아이들도 내 뜻을 이해해줘 함께 일하고 있어 뿌듯하다”는 자식자랑(?)이 뒤이었다. 아들 현석(33)씨는 이미 2006년부터 업체의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2년 전부터는 딸 민경(28)씨도 합류, 마케팅과 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현석씨는 아리랑만이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 오씨의 ‘손맛’을 전수받고 있어 이채롭다. “아리랑 김치의 비밀인 어머니의 소스(김칫소) 버무리는 비법을 전수받기로 했죠. 지금은 대표 상품인 맛김치와 포기김치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셨지만 사업적인 측면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싶었어요.” ◇어머니의 손맛을 계승한다= 현석씨는 매일 어머니 오씨와 함께 김칫소 버무리는 작업을 함께 한다. 직접 배추 등을 살피고 신선하지 않은 재료를 걸러내는 어머니의 노하우도 함께 배우고 있다. 현석씨가 오씨의 계승자가 된 건 어릴 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 그는 고교 졸업 뒤 다니던 대학까지 포기하고 친척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업체 운영과 요리 등을 익혔다고 한다. 특히 요리를 배우고 싶어 수년 동안 이태리와 프랑스 등지를 배낭여행 하며 음식 문화를 살펴보는 열정을 보였다. 현석씨는 “음식 관련 사업을 하는 부모님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며 “결국 아리랑 김치에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귀결인 셈”이라고 말했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 그가 찾고자 했던 ‘맛’도 김치와 서양음식의 합일점. 최근 그는 어머니의 김칫소에 샐러드용 식초 등을 사용해 서양인 입맛에 맞는 배합을 찾고 있다. 그는 “전통방식보다 조금 변형된 ‘하이브리드(Hybrid) 김치’를 타민족 친구들에게 맛보게 하면 좋아한다. 언젠가 타민족 공략에 활용됐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건강식’ 개념으로 타민족 공략=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민경씨는 졸업 뒤 마케팅 관련 일을 했다. 예술과 마케팅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살려 그는 지난해부터 타민족에게 김치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아리랑김치는 대형 한인마켓에 납품하기보다 단골과 식당 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 개척은 지상과제이기도 했다. 다행히 브루클린과 맨해튼 등지의 식당과 마켓에서 아리랑김치를 주문하는 고객들이 늘기 시작했다. 올해 브루클린의 유명식당인 전통 레스토랑 ‘맨해튼 인’은 에피타이저 메뉴에 아리랑김치에서 내놓은 총각김치와 포기김치를 내놓기 시작했다. 또 8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유기농 전문 마켓 ‘킴스 밀레니엄’도 아리랑김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김치 수요층의 변화에 대한 민경씨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른다. “최근 ‘김치’는 최고 건강식으로 손꼽히고 있어요. 자연 유산균 때문이죠. 특히 우리 김치 맛을 본 요리사들이나 마켓 주인들은 대부분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해요. 한인들에게는 주식이지만 타민족들에게는 건강을 위한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마케팅을 펼치고 있어요.” 민경씨는 각종 기관과 요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김치를 기부하는 아이디어도 냈다. 특히 올 봄 유명 요리학교 CIA 한인학생회의 ‘김치 요리 이벤트’에 김치를 제공해 학생들이 김치볶음밥과 잡채 등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김치사랑= 현석·민경 남매는 한인 2세다. 대부분의 2세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어릴 때부터 김치를 좋아했다는 게 어머니 오씨의 설명. 학교가 끝나면 으레 아리랑김치를 찾아왔다고. 남매 둘 다 “단 한 번도 부모님이 김치 사업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고 수 차례 강조했다. 오죽했으면 민경씨의 어릴 적 별명이 ‘김치걸’이었을까. ‘김치공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라는 걸 친구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민경씨는 “한인 아이들도 특별히 놀리지 않아서 김치걸이라는 별명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며 “오히려 학교 끝나면 친구들 서너 명과 어울려 우리 공장에 놀러왔다. 김치를 함께 먹기 위해서”라며 웃었다. 현석씨의 김치 사랑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아시안 페스티벌이 열려 학부모들이 갈비·잡채 등을 준비했다는 것. 하지만 김치는 냄새가 난다며 아예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 오씨는 “현석이가 어느 날 ‘왜 김치를 내놓지 못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다음부터 백김치를 만들어 페스티벌에 보냈더니 참가자들이 다들 좋아했다”고 말했다. 물론 김치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때도 있었다. 현석씨는 “흑인 친구들이랑 집에 왔는데 한 친구가 우리집 냉장고 문을 열더니 처음 맡는 김치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부모님이 만드는 한국 음식이라며 먹어보라고 했더니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한시름 놨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이처럼 김치를 터부시하지 않는 것은 오씨가 김치사랑을 몸소 보여줬던 덕분이다. 남매는 모두 “어릴 때부터 새벽에 나가 밤 11시까지 공장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민경씨는 “1994년 어머니께서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까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단순히 사업이 아니라 김치에 대한 사명감 없이는 못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어머니 오씨에게 이런 자녀들은 그저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계속되는 불경기와 배추 등 재료값이 올라가 매출이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인데 자녀들의 지원은 든든하기만 하다고. “전 하던 대로 일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의 울타리 역할만 해주고 싶어요. 아직 아이들이 완전하지 않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김치 사랑이 더해가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웃음) 남매는 “김치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것을 아리랑을 통해 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특히 민경씨는 “선도가 떨어지는 배추가 왔을 때 어머니가 배추를 돌려보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 때 고객이 오면 이유를 설명하고 며칠 뒤에 오라고 하셨던 장면이 ‘아리랑 김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면서 “부모님의 고집스러운 전통에 젊은 감각을 입혀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강이종행 기자 kyjh69@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뉴욕] '컴퓨터' 전공 아버지와 '의대' 졸업 딸이 만났다

장례일에 행복한 아버지 보고 맥칼리스터대 입학 가업 잇기 불체자·흉악범 등 사연도 다양…사소한 것도 약속지켜 신용쌓아 뉴욕시 최대 한인 밀집지역인 퀸즈 플러싱 41애브뉴에 있는 ‘중앙장의사’는 한인 이민자들의 눈물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자녀들을 성장시키고 쓸쓸하게 혼자 살다가 이국생활을 마감한 이민 1세대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생을 마감한 불법체류자, 흉악한 범죄의 희생자 등 중앙장의사를 거쳐 영면(永眠)에 들어간 한인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중앙장의사는 지난 90년 문을 열었는데, 당시로서는 미 동부지역 최초의 한인 장례식장이었다. 현재는 플러싱에 두 군데, 뉴저지 잉글우드, 리지필드 지점 등 4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중앙장의사는 지난 20년간 무연고·범죄 피해 한인들, 극빈층 한인들의 장례가 종종 치러진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중앙장의사 하봉호 대표(59)의 평소 지론에 따른 것이다.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자가 공인 장례사로= 하 대표가 장례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특별하다.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삼성전자 연구소에서 잠시 근무하다 82년 유학생으로 미국땅을 밟았다. 프랫대에서 컴퓨터사이언스 석사 과정을 마쳤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하 대표는 자신이 장례업계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하 대표는 유학생 시절 주말마다 성당을 다니며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하 대표가 따르던 미국인 수녀가 있었는데, 그는 공인 장례사기도 했다. “수녀님을 따라 플러싱에 있는 여성 홈리스 셸터에 봉사를 나가곤 했습니다. 당시 셸터에는 한인 여성도 3명이 있었는데, 저는 노숙자들과 악수를 하면 곧 손을 씻곤 했어요. 그러나 수녀님은 이들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돌보며 직접 장례를 치러주는 등 진정한 봉사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저는 늘 사회에 무엇인가를 빚진 느낌이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무슨 사업을 할까 고민하다가 당시로서는 한인사회에 전무했던 장례업에 도전하기로 한 겁니다. 사업도 하고, 남도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 대표는 결국 맨해튼에 있는 장례학 대학인 ‘아메리칸 아카데미 맥칼리스터 인스티튜트 오브 퓨너럴 서비스’ 입학을 결정하고, 생소한 공부를 시작했다. 88년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주 공인장례사 라이선스를 취득한 그는 2년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마침내 90년 중앙장의사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레지던트로 일했던 미국계 포가티(Fogarty) 장례식장을 인수해 중앙장의사를 개업했다. 뉴욕 지역으로 한인 이민이 시작된 이후 80년대까지 한인 장례업체가 없었던 이유는 한인사회의 낮은 사망률로 인해 비즈니스로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욕시 보건국 자료에 따르면 한인이 처음으로 별도 분류되기 시작한 지난 87년에는 뉴욕시에서 한인 97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2008년에는 사망자가 278명에 이르러 20년새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의대 졸업한 딸도 아버지 뒤이어= 하 대표에게는 최근 든든한 후원자이자 후계자가 생겼다. 딸 혜민(30)씨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한 것. 혜민씨의 이력은 아버지만큼이나 독특하다. 그는 서울대 의예과(99학번) 예과 과정 6년을 마친 ‘예비 의사’였다. 그러나 이후 진로를 바꿔 뉴욕대(NYU)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가업을 잇기로 결정하면서 아버지가 공부한 맥칼리스터대에 입학해 지난 2007년 장례학과 과정을 마쳤다. 혜민씨는 “의대를 안 다녔다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와주고 싶어도 ‘무서워서’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로서 의대를 다닌 게 결국 가업을 잇는데 도움이 됐다는 말이다. 우연치곤 재미있는 일이다. “아버지는 항상 늦게 들어오셔도 집에 오시면 행복해 하셨고, 자기 일을 좋아하셨죠. ‘나도 크면 저렇게 살아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어요. 또 어릴 때 식탁 옆에는 처참하게 굶주린 모습의 이디오피아 어린이 사진이 붙어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부러 붙여놓았던 사진인데, ‘밥 남기지 마라’고 얘기하곤 하셨어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라고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가르치셨죠.” 장례사라는 직업에 대한 아버지와 딸의 생각은 같았다. “유가족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이 되어줘야 한다. 고인의 모습을 편안하고 예쁘게 만들어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혜민씨는 장례사 후배로써 아버지에 대해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구석의 조그만 전구가 끊어진 것도 금새 잡아내실 정도로 매사에 노련하다. 제가 고인을 아름답게 꾸며도 마무리는 늘 아버지께서 해주신다”며 스승이자 선배로서 배울 게 많다고 수줍어했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이 접해= 하 대표는 20년 넘게 장례사로 일하다 보니 가슴 아픈 사연도 많이 접했다. 15년 전 한 할머니의 장례를 맡게 됐는데,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아들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 방문을 추진하다가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소식을 접한 하 대표와 유족들은 당시 한미 양국 정부와 정치인, 적십자사 등에 호소해 북에 있는 아들이 결국 미국을 방문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한번은 중년의 여성이 찾아왔다. 아이들을 낳은 후 집을 나갔던 남편이 병들어 죽을 때가 되니 집을 찾아왔다는 것. 그 동안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아들은 교도소에, 딸은 중국계 갱 단원이 돼 있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하 대표는 교도소에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에 요청했고, 갱 단원이 된 딸도 수소문 끝에 찾아내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하 대표는 “아들은 양 손에 수갑을, 양 발에 족쇄를 찬 채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아들과 딸, 엄마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한 시간여 고인이 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하 대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유족들이 장례 상담을 하러 왔을 때 ‘수의는 무엇으로 할거냐’ ‘관은 어떤 것을 사용하겠냐’며 비즈니스에만 급급하면 안 된다”며 “대부분의 유족들은 장례 상담을 하러 왔다가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을 빚는데, 먼저 가족들을 화해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딸 혜민씨도 장례사로 일하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는 “한번은 장례가 끝난 뒤 한 자녀가 찾아와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를 요구하면서 ‘내가 가져갔다고 다른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면서 “부모가 돌아간 뒤 유산상속 등의 문제로 갈등을 빚는 자녀들을 볼 때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례의 본분은 ‘유족의 슬픔’ 달래는 것= 중앙장의사는 현재 협력업체만 40여 개에 이른다. 매년 500~600여 명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이는 미국 내 장례식장이 평균 100여 명을 처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숫자다. 타민족들의 장례가 빈번히 치러지기 때문이다. 현재 중앙장의사에는 중국계·히스패닉 장례사와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직원만 30명이 넘는다. 하 대표는 한인만을 상대로 한 장례업은 경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한 아내의 도움을 받아 중국계 고객에게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장례업은 보람과 자부심이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라며 “사소한 것이라도 유가족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며 신용을 쌓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유가족에게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우선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부터 찾는다. 장례사의 본분은 ‘유족의 슬픔을 달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지난 87년부터 가족의 묘소를 방문하고 싶어도 교통편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노인들을 위해 무료 성묘 서비스를 열고 있다. 하 대표는 “19년 전 외아들을 잃고 가슴에 묻은 한 노인이 장의사를 찾아와 성묘를 가고 싶은데 교통편이 없다며 울먹이는 모습을 봤다”며 “자식에 대한 애절한 사랑에 함께 목놓아 울었고 이후부터 무료 교통편을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뉴욕] 딸 덕분에 미국인 고객 40%로 '껑충' 뛰었죠

'건축업계서 여자가 뭘 아냐' 핀잔에 이 악물고 남몰래 끊임없이 노력 이젠 없어서는 안될 중추적 역할 건축 전문잡지 ‘아키텍트(Architect)’는 최근 화려하고 웅장한 대형 건축물 대신 이례적으로 소규모 한인교회의 디자인을 소개했다. 이 잡지는 보스턴 한인사회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보스턴한인교회의 어린이 예배당과 교육센터에 주목했다. 교회 건물 옆으로 이어진 어린이 예배당은 대나무를 이용한 인테리어와 유럽 스타일의 새로운 자재를 이용해 어린이의 안전을 배려한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줬다. 새로운 시도로 건축잡지를 장식한 시공업체는 퀸즈 화잇스톤에 본사를 둔 강석건설. 이 업체는 한국과 미국에서 건축일로 잔뼈가 굵은 지윤구 사장과 1.5세 딸 제니퍼 지(한국이름 효정) 총괄매니저가 경륜과 패기로 신구 조화를 이루며 교회건축 전문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 사장이 35년간 쌓아 온 건축 노하우에다, 제니퍼 매니저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불경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 사장은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에 현장 인근에서 숙식을 하며 공사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한 만큼 보람도 크다”고 설명했다. 보스턴한인교회 프로젝트는 1만2000스퀘어피트 규모로 지하를 포함해 2층짜리였다. 지 사장은 이 같은 ‘보람’을 건축업계에 종사하는 최대의 덕목으로 여긴다. 어느 하나 쉽게 지은 건물이 없는 만큼 피와 땀이 묻어 있는 건물을 볼 때마다 자식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건축은 돈을 먼저 생각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나 하나 프로젝트가 완성될 때마다 보람으로 여기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 완성도도 높아집니다.” 지 사장의 이러한 생각은 딸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건축업계에서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도전정신이 생긴다는 것이 제니퍼 매니저의 설명이다. 이 분야에서 일한 지 8년이 지나면서 ‘프로’다운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다. “건축물은 모두가 자기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산에 맞춰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조사하고 자재를 주문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낍니다.” 제니퍼씨가 젊은 여성으로 건축업계에서 커리어를 쌓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여자가 뭘 알겠냐’며 무시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 건축 관련 전시회가 열리면 무조건 달려가 하나 하나 건축일을 배워갔다. 건축 회사 담당자가 자재 이름 하나도 모르냐는 핀잔이라도 들을까 무서워 남몰래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이다. 이제는 의뢰인을 만나 공사비를 흥정하고, 견적을 내고, 자재를 구입해 허가를 내기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베테랑 건축업자’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건축업계에 뛰어든 것은 당연한 결과다. 어릴 때부터 현장을 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고, 주변에도 건축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 그러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이다. 7살 때 가족을 따라 미국에 온 제니퍼씨는 럿거스 뉴저지주립대에서 조경설계를 공부했다. “잠시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을 꾸긴 했어요. 의대 진학을 위해 공부도 했지만 프로젝트에 맞춰 현장과 사무실을 뛰어다니는 일이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요.” 2001년 대학을 졸업한 제니퍼씨는 설계사무실에서 사회 초년병으로 일을 배워갔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기 전에 사회를 먼저 깨닫고, 어려움도 겪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아버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뉴욕시 빌딩국을 출입하고, 기초적인 건축 업무 처리과정을 알아갔다. 이듬해부터 아버지와 함께 강석건설의 운영진으로 참여했다. 벌써 8년째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는 제니퍼씨는 이제 없어서는 안될 강석건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 사장은 “딸과 함께 일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서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녀 지간을 떠나서 모든 업무를 스스로 처리하기 때문에 이제 회사를 아예 맡겨도 될 정도가 됐다. 조만간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한국과 미국 문화를 모두 이해하면서 미국사회로 확장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딸을 평가했다. 실제로 딸의 역할이 커지면서 미국인 고객이 전체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늘어났다. 제니퍼씨는 “한인 하청업체는 정확한 계약조건이 없어도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정이 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단점이 있다. 반면 미국인들은 정확한 계약조건에 맞춰 철저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두 문화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대처해 나간다면 양쪽 시장을 다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며 사업 비결을 소개했다. 그는 “앞으로 미국교회와 장애인시설 등으로 미국시장을 공략해 나가겠다”며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강석건설= 1992년 설립됐다. 98년 폭발사고로 붕괴된 뉴욕효신장로교회 재건축(2만2000스퀘어피트)을 비롯해 리틀넥에 있는 은혜교회(2만3000스퀘어피트·2003년), 뉴저지한인장로교회 등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 공사를 맡았다. 교회 전문으로 알려지면서 퀸즈나 브루클린 등 미국교회 신축과 증축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한인업체로는 거의 유일하게 장애인 시설 전문업체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뉴욕주 장애인복지 관리국과 연결, 일반 주택이나 건물을 장애인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로 바꿔 주는 것이다. 일반 주택이나 상용건물 등도 취급한다. 이중구 기자 jaylee2@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뉴욕] 엄마가 쌓은 기반에 딸 아이디어로 '업그레이드'

엄마가 하는 일 싫어 방황하다가 '내가 아니면 누가 도울까' 돌아와 현재 다운타운 등 3개 매장 운영…'페이스북' 마케팅으로 고객 소통 뉴욕 패션과 트렌드를 선도하는 맨해튼 소호의 한인 네일살롱 '싱크핑크(Think Pink)'. 관광객은 물론 예술가·기업가 등 다양한 고객층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에서 서비스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는 스테파니 김(34)씨는 직원교육은 물론 소셜네트워크사이트인 페이스북을 이용한 마케팅, 고객 챙기기 등으로 분주하게 하루를 보낸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거나 파악은 했어도 영어가 부족해 바로 서비스로 이어지지 못해 난감해하는 직원의 고민까지 처리해 주는 해결사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씨는 21년째 네일업에 종사하며 맨해튼에 3개의 싱크핑크 매장을 갖고 있는 이은혜 사장의 장녀다. 이 사장이 올 1월 세 번째인 소호 매장을 개설하면서 가업을 잇기 위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엄마가 하는 일이 싫어 떠나보기도 했다'는 김씨는 이제는 엄마가 닦아 놓은 튼튼한 기반에다 자신만의 마케팅 아이디어를 접목시키면서 브랜드화와 국제적인 프랜차이즈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적극적이다. ◆방황과 깨달음= 김씨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많은 방황이 있었다. 김씨는 '네일살롱 레이디'는 안 되려고 했다고 한다. 삶의 터전을 닦아야 하는 이민 1세대로 너무 일만 하는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한 데다 두 살 때 이민 와 영어가 유창한 한인 2세로 미국인들이 아시안 네일살롱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김씨는 "남의 손발을 닦는 직업인 데다 TV 코미디 등에서 모국어로 수다를 떨며 고객 서비스는 무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아시안 네일살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등이 싫어 네일업에만은 뛰어들지 않으려 많이 겉돌았다"고 말했다. 장사도 싫고 '엄마의 삶은 내 삶이 아니다'는 생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도 해 봤지만 역시 맏이로서 항상 마음은 편치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업계에서 '큰 사람'이 되어 있는 엄마도 어느날 이제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 '아 우리 엄마도 늙는구나. 내가 아니면 누가 도울까'란 생각이 들더라. 소호 매장을 오픈을 앞두고 엄마가 도움을 요청해 오면서 이제는 엄마를 도와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 스스로도 4, 5살짜리 아이들을 둔 엄마가 된 것도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이유있는 경영수업= 김씨의 방황 속에서도 이 사장의 경영 교육은 꾸준히 이어졌다. 이 사장이 1989년 네일업에 뛰어들기 전 운영했던 브루클린 잡화점 매니저로 4년(2002~2006년)간 경영수업을 받게 하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소호 매장 오픈을 앞두고 1년 동안 다운타운 매장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매니저 역할을 하도록 해 네일살롱의 분위기를 익히게 했다. 특히 네일 기술자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직원 화합 도모와 문제 해결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사장은 "소호 매장은 스테파니가 관리를 맡기로 하면서 용기를 갖고 추진하게 된 매장이다. 우리 1세대와는 다른 젊음·패기·세련된 감각이 소호 매장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어 아주 든든하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고객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매장의 가치를 더 높이고 있다. 이 사장은 "직원-고객 간의 통역은 물론 직원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고객의 니즈를 설명해 주면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미국인 고객들을 맞고 거리낌 없이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은 물론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 사장의 좌우명은 '꿈은 꼭 이루어진다. 단, 계속 그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의류매장· 패션가게 등이 즐비한 소호에 이 사장이 네일살롱을 오픈하는 데는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비싼 렌트도 걸림돌이였지만 뉴요커 그루밍족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소호에서의 장사는 그만큼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일부러 돌아서라도 소호를 지나가며 딸 아이에게 엄마의 꿈을 얘기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경기침체 덕분에 그 꿈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제 그 꿈을 김씨가 이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2세의 패기로 한층 더 나은 꿈으로 승화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국제적인 프랜차이즈 목표= 김씨의 목표는 싱크핑크를 국제적인 브랜드·프랜차이즈로 키우는 것이다. 서비스에 만족하고 현지에 프랜차이즈를 오픈할 것을 종용하는 관광객들이 많은 것도 고무적이다. 김씨는 "고객들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8개월 전부터 페이스북에 홈페이지도 만들고 국경과 거리·시차를 넘나드는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웹사이트도 처음 개설하고 업데이트 중"이라고 말했다. 아시안 네일살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한 직원 교육도 중요한 과제다. 김씨는 "전문성을 갖춘 네일살롱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직원들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영어교육 등에 꾸준히 신경을 쓸 생각이다. 엄마가 쌓아놓은 시스템에 나만의 색깔을 입혀 한층 업그레이드된 싱크핑크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싱크핑크= 이은혜 사장(시누이·55)과 제니퍼 이 총매니저(올케·51)의 철저한 상호보완 관계로 성공시킨 합작품이다. 1989년부터 브루클린에서 '핑크네일'이라는 이름으로 토털스파 매장을 운영해 오다 1999년 맨해튼으로 진출하며 이름을 싱크핑크로 바꿨다. 현재 소호(455 W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미드타운(41 W 58스트릿)과 다운타운(445 아메리카애브뉴) 등에 3개 업소를 운영 중이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LA] "엄마의 '그림보는 눈' 딸도 그대로 빼닮았죠"

母 "당차고 야무진 딸 그저 자랑스럽죠" 女 "최고의 롤모델 엄마 계셔 큰 행운" # 40여년 전, 여고생 표미선의 놀이터는 학교 미술실이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표미선에게 담임 선생님은 “여자는 미술도 괜찮아. 너 미술반에서 많이 놀았잖아”하며 미대 진학을 추천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림에 빠진 표미선은 학교 졸업 후 미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사람 만나고, 사업하는게 좋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화랑일이었다. 표 갤러리(PYO Gallery). 그녀가 설립해 30여년을 이끌어 온 화랑이자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이제 표미선은 이태원과 청담동, 베이징과 LA에 갤러리를 거느린 한국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 중 한 사람이 됐다. # 20여년 전, 초등학생 하이디 장의 놀이터는 화랑이었다. 늘상 세계적 주목을 받는 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자랐고, 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책도 많이 읽어 또래 아이들보다 영특하고 다부졌다. 방송반에서도 활약했다. 음악과 무용에도 소질이 있었다. 특히 발레는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너 발레할래, 미술할래?’ 묻자 하이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미술이요!” 엄마는 빙긋 웃음 지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엄마 출장길을 따라 다니며 제법 큐레이터 역할을 했던 딸이었으니까. 딸 하이디 장이 미술로 진로를 정하자, 엄마 표미선은 단순한 ‘인생 선배’가 아닌 커리어적 ‘롤 모델’로도 최선을 다했다. 15살부터 LA로 유학보내 미술로 유명한 샌타모니카 크로스로즈 스쿨을 졸업시켰고,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함께 유명 미술 대학을 샅샅이 다니며 진로를 모색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순수 회화를 잘 해왔던 딸을 세계 초일류 대학인 예일 미대에 보내야겠다 내심 마음 먹고 있었다. 하지만 딸은 똑부러졌다. UCLA에 가겠다는 것. 미술사와 예술행정도 함께 공부해 엄마처럼 화랑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엄마는 다시 한번 빙긋 웃음을 지었다. 딸의 ‘그림 보는 눈’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자기 그림보다 더 독창적 그림을 그린 다른 친구 그림을 먼저 들고 와 보여주더라고요. ‘난 그림을 만드는데, 이 친구는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는 얘길 하길래 놀랐었죠. 어린 아이에게 이런 안목이 있구나 싶었어요.” 딸은 미술 안에서도 자신의 적성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있었을테고 큐레이터나 교육자의 길도 갈 수 있었겠지만, 하이디 장의 선택은 한결 같았다. “어려서부터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분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어요. 화랑 일이란 게 결국은 사업이자 작가,고객 등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미술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일의 매력이라 생각했죠.” 졸업 후 하이디 장은 잠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미술관이나 다른 화랑을 기웃거려봤다. 하지만 곧 어머니 표미선 대표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표 갤러리의 일을 시작했다. 마침 세계 시장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표 갤러리에 하이디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트페어 참가나 해외 지사 설립 등 중요한 사업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표갤러리 LA의 디렉터로 임명돼 모든 전시기획과 운영을 책임지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자신의 뒤를 이은 딸이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갤러리 운영이란 게 보는 것만큼 화려하고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에요. 어려움도 많죠. 게다가 저희 세대에만 해도 아무런 계획이나 체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만 일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어요. 하지만 제 딸은 학문적 기반도 탄탄하고 행정력도 뛰어나고 꿈도 커요. 옆에서 가만 지켜보면 그림 하나, 조각 하나 들고 옮기는 것도 어찌나 당차고 야무진지 몰라요. 사람들 상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엄마의 표 갤러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부담도 있겠죠. 하지만 제 눈엔 그저 다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딸의 어깨는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어머니가 있어 한없이 든든하다. “어릴 적엔 특히 부담이 컸어요. 하이디 장이란 이름보다 ‘표미선의 딸’로 먼저들 아셨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엄마가 계시기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다른 누구보다 빨리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커요. 남들은 롤모델을 찾아 헤매는데 전 최고의 롤모델이 언제나 곁에 계셔주시니 얼마나 큰 행운이에요.”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의견 충돌도 생긴다. 엄마 표 대표가 포기를 모르는 저돌적 여장부 스타일이라면 딸 장 디렉터는 철저히 계획하고 은근하게 다가서는 지략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표 대표는 문제 상황에서 될 수 있는 한 타협점을 찾아 원만한 해결을 추구하지만, 장 표 대표는 원칙을 고수하는 편이다. 표 대표는 “자랄 땐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싫다’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인데, 일을 하면서는 ‘그건 아니죠’, ‘그렇게 하시면 안돼요’ 라며 딱 잘라 말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며 웃는다. 하지만 “항상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결과는 좋을 수 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장 디렉터 역시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엄마보다 좀 느긋한 편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에너지 넘치고 실행력 있는 엄마를 많이 존경하고 닮고 싶다”고 맞장구쳤다. 문득 2대째 내려온 미술인, 갤러리 운영가로서의 삶을 3대째까지 물려줄 생각은 없을까 궁금해졌다. 마침 하이디 장 디렉터가 지난달 초 첫 아기, 그것도 딸을 낳았다. 은근히 의중을 묻자 갤러리를 운영하는 스타일처럼, 표 대표는 시원시원하게, 장 디렉터는 신중하게 대답을 한다. “우리 손녀딸이 백호랑띠라잖아요. 활발하고 곱게 잘 커서 나중에 우리 뒤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는 하고 있죠. 그림 판매를 위주로 하는 갤러리가 아닌, 우리만의 성격과 색깔을 갖고 있는 그런 표 갤러리로 말이죠. 항상 새로운 작가를 찾고 젊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가는 표 갤러리의 미래를 지금부터 꿈꾸고 있습니다.”(표) “아직 태어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딸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엄마라고 그 무엇도 강요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원한다면 어머니가 저에게 하셨듯 아낌없이 지원해줘야죠. 저는 그 전까지 LA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나 표 갤러리의 이름이 통할 수 있도록 화랑을 키워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장) 글·사진=이경민 기자 rachel@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LA] '1세 경영정신 + 2세 전문성'으로 시너지 효과

'뚝심 있는 승부사' 아버지와 두 아들, 사업 초창기부터 '사업 기본' 가르쳐 큰아들에겐 대외업무, 작은아들은 회계…보통 기업과 달리 가업 승계 일찍 시작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들 흔히들 말한다. 한국에서 이민와 맨손으로 시장을 개척해 부를 일군 한인 1세가 미국에서 성장한 2세에게 물려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민자 부모가 그간 쌓아놓았던 인맥, 경영 방침 등이 언어나 문화 등의 장벽에 부딪혀 계승되기 보다는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평생을 쌓아온 부모의 가업을 섣불리 이어받은 자식들이 송두리채 사업체를 망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수성’을 위한 체계적인 노하우가 필요한 시점이다. 캔디 하나로 주류시장을 뚫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코아멕스’는 아버지의 가업이 아들들에게 잘 계승된 대표적인 한인 기업이다. 코아멕스는 LA다운타운을 비롯, 인더스트리, 온타리오, 파라마운트, 할리우드, 가디나, 샌타애나 등 남가주에서 9개의 도매점을 갖고 있는 대형 그로서리·캔디 도매업체. 한인업체로는 10여년 전에 거의 유일무이하게 컨벤션 산업에 진출해 꾸준히 성과를 일궈오고 있는 진취적인 기업이기도 하다. 개최 연수가 15년째인 ‘코아멕스 그로서리&캔디 엑스포’는 참가 업체가 많아지면서 수년전부터 행사장을 아예 LA컨벤션센터로 옮겨 본격적으로 열고 있다. 처음에는 바이어를 확보하고 판매망을 확대하기 위해서 시작한 이 컨벤션은 현재 농심 오리온 자연나라 등 한국 및 한인업체를 포함해 네슬레 허쉬 M&M‘s 등 80여개의 식품회사가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로 성장했다. 이런 이유로 업계에서 코아멕스의 김용환 회장은 ‘뚝심있는 승부사’로 통한다. 아이들이 먹는 캔디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발상 자체가 쉽지 않은 데다 그것 하나로 사업을 계속해 키워왔기 때문이다. 또 유통망 개발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캔디 엑스포’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초기에는 리커스토어 등 한인 위주의 바이어에서 지금은 2500여명의 소·도매업 관계자들이 방문해 업계와 신제품 트렌드를 파악하는 행사로 키워냈다. 매년 수천가지의 신상품이 쏟아지고 유행에 민감한 업계 특성에도 불구, 지금까지 사업을 이끌 김 회장은 “캔디에도 유행이 있다”는 말로 사업 철학을 설명한다. 식품 도·소매업, 마켓, 리커 스토어, 주유소, 식당, 99센트 스토어 등 다양한 업종에 맞는 품목을 개발한 것이 바이어들의 구매 심리와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매년 수시로 베스트셀러 상품이 바뀌는 업종 특성상 김 회장의 유연한 판단과 과감한 투자는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박리다매 전략에다 지역별로 유통망을 확장하면서 ‘세일즈 볼륨’을 키웠다. 또 업주들에게 내년에 유행할 신상품 정보를 알려주고 판매자와 원스톱 계약을 추진했다. 일반 브로커를 거치지 않아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유통망을 무기로 고국통신 판매에도 뛰어들었다. 추석이나 연말을 앞두고 한국에 선물을 보내려는 한인들의 수요가 크게 늘면서 갈비및 정육세트 수산물세트 과일세트 한과세트 양주및 전통주 선물세트 등 30~300달러대로 종류와 가격이 다양한 상품들을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다. 사업체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김 회장은 대신 사재 500만달러를 털어 장학사업과 비영리 단체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김용환 재단’을 설립했다. 한미연합회(KAC) 등 한인 비영리 단체들에 잇따라 자금 지원을 하며 커뮤니티 환원에 대한 의지도 뚜렷히 했다. 이와함께 김용환 회장은 보통 한인 기업들과 달리 가업 승계를 일찍 시작했다. 보통 부모의 사업이 은퇴를 앞둔 시점에 자녀들에게 계승되는 것과 달리 사업이 초창기 비약적으로부터 발전할 때부터 사업의 기본을 아들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10여년이 넘게 공동으로 경영을 해 온 지금, 김회장은 두 아들 패트릭과 찰리에게 각각 CEO와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사실상 은퇴를 한 상태이다. 대외 업무는 큰 아들 패트릭에게, 회계 및 자금운영은 둘째 아들 찰리에게 업무를 분담시킨 것이다. 캘스테이트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한 찰리 김 사장이 코아멕스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약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코아멕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사 전반적인 운영상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도매상에서 취급하는 식료품과 생활용품이 어떻게 유통되는 지 물류 네트워크를 꼼꼼히 살피면서 배웠다. “최고의 멘토는 아버지입니다.” 찰리 김 사장은 아버지의 세심한 업무 태도에게서 대부분의 일을 배웠다. 회계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해본 적도 없지만 아버지를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장부를 도맡아서 배웠다. 찰리 김 사장은 아버지로부터의 경영 수업을 이렇게 요약했다.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특히 경영자인 아버지가 비즈니스를 처음 배우는 과정에서 멘토 역할을 해주신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죠. 평생동안 쌓아오신 사업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때로는 쓴소리가 쏟아질 때도 있지만 전혀 싫지 않았어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의 개선점들을 찾아나가려고 노력합니다.” 아들들이 경영에 뛰어들면서 코아맥스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미국 업체들과의 거래가 급속도로 늘었다. 1세식 경영 마인드와 2세의 전문성과 언어 역량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창업주인 아버지에게서 많이 배우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봐 늘 자신을 채찍질 해온 아들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김용환 회장의 창업 정신을 이어받은 찰리 김 대표는 앞으로의 코아멕스 비전을 “성장”으로 꼽았다. 대표적인 한인 그로서리 및 캔디업체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배고프다”는 것이다. 치열해지는 물류 경쟁과 업계 각축전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들의 각오는 다부졌다. “아버지가 손수 일궈내신 기업을 잘 이어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죠. 그렇지만 결코 두렵지는 않습니다. 코아멕스를 더욱 성장시켜서 가업을 물려주신 아버지가 아들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실 수 있도록 할겁니다.”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훨씬 편한 이들에게 앞으로 코아멕스의 미래는 한인 최고의 유통업체가 아닌 미국 최대의 그로서리·캔디 유통업체로 성장시키는 일이다. 새로쓰는 도전의 역사에 오늘도 삼부자는 열심히 뛰고 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koreadaily.com

2010-12-31

[2011 점프 업 - LA] 아픈 맘 치유·커뮤니티 봉사나선 '그 엄마에 그 딸'

엄마는 의사다. 딸은 변호사다. 엄마는 37년차, 딸은 9년차다. 모녀는 ‘커리어우먼’이다. 엄마는 정신과 전문의다. 딸은 상담기관 책임자다. 모녀는 그렇게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유한다. 엄마는 비영리 단체 이사다. 딸은 그 비영리 단체 소장이다. 모녀는 그렇게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한다. 엄마는 수잔 정 박사(65), 딸은 카니 정 소장(33)이다. 모녀가 몸 담고 있는 단체는 한인가정상담소. 모녀는 그렇게 한 단체에서 한인 커뮤니티를 돌보고 있다. #엄마 이야기 이민 온 후 정신없이 달려온 의사의 길 어느새 버팀목이 된 딸이 자랑스럽다 엄마는 1973년 뉴욕으로 이민왔다. 연세대학교를 나와 내과 레지던트를 마쳤을 때였다. 사실 정신과 전문의가 된 것은 내과 의사는 많은 반면 필요로 하는 환자는 많은데 비해 정신과 의사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일반 정신과 과정 4년에 소아 및 청소년 과정 2년을 더 공부하고 정신없이 커리어를 쌓고 돌아보니 한인들의 정신과 치료에 대한 인식은 너무도 부정적이었다. 정신질환하면 정신분열증을 떠올렸다. 정신과하면 ‘미친 사람’이 가서 치료받는 병원이라 생각했다. 못 배운 사람, 많이 배운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에 상관없이 그랬다. 치료를 받고 싶어도, 치료가 필요해도 꼭꼭 숨겼다. 그래서 한인 커뮤니티에 나와 정신질환에 대해 알리고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81년 LA에 와 처음 뛰어든 봉사는 KYC(지금의 KYCC). 한 교회 다락방에서 모여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상담사들을 지도했다. 환경은 열악하고 한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무지했다. 90년 초반부터는 가정상담소에서 상담사들을 교육하고 지원했다. 상담기관의 상황도 열악했지만 상담을 받기 위해 찾는 한인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이들은 치료가 필요한 데도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체류신분 문제 때문에 병을 키우다 곪을 대로 곪은 채로 상담소를 찾았다. 하지만 2000년초 가정상담소를 떠났다. 그래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학교, 교회, 단체 등의 세미나와 워크샵을 찾아가 집중력 결핍증, 우울증, 조울증에 대해 설명했다. 정신질환은 미친 것이 아니라,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두뇌 작용의 균형이 깨져 생기는 것이라고,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렸다. 엄마는 카이저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이면서 USC 의과대학 조교수다. 한달에 두번 가정상담소에 나가 상담사들을 지도한다. 여전히 세미나와 포럼 등에서 강의한다. 지금 엄마는 혼자가 아니다. 딸과 함께 봉사한다. 딸과 지식을, 경험을 나눈다. 엄마는 딸 덕분에 커뮤니티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노출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딸과 함께 하기 때문에 든든하다. 딸은 이제 엄마가 버티고, 견디어 내는 힘이다. 엄마는 딸이 자랑스럽다. 엄마는 일과 가정 모두 조화롭게 해내는 딸이 대견스럽다. 딸이 지금까지 이상적으로 잘 해왔지만 인생은 참 쉽지가 않다. 엄마는 내 어머니가 해준 것처럼 딸에게 일과 가정, 커리어와 봉사 모두 잘 할 수 있도록 끌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딸 이야기 행동으로 보여준 엄마 '흔적' 닮고싶어 사회 약자위해 법적 조언·상담 나섰다 딸은 일과 가정, 커리어와 봉사 모두 열심인 엄마를 보며 자랐다. 딸이 자라면서 본 엄마는 바빴다. 하지만 속상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엄마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릴러오고, 학교 일이 있으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주말에 가족과 함께 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하는 일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었다. 딸에게 봉사는 당연한 일이 됐다. 딸은 엄마가 한번도 ‘노(No)’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세미나에 와달라고 하면 엄마는 항상 달려갔다. 그렇다고 엄마처럼 돼야겠다, 엄마처럼 해야겠다 생각해본 적은 없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음이 한인 커뮤니티 봉사에 쏠렸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 생각을 하거나, 해야겠다 마음을 먹지도 않았다. 그냥 봉사가 자연스러웠다. 딸은 2002년 변호사가 됐다. 하지만 잘 나가는 로펌 대신 첫 직장으로 시민권리를 위한 비영리 단체를 택했다. 그 어떤 과정에서, 그 어떤 결정에서 의식적인 것은 없었다. 엄마는 딸의 결정을 지지하고 딸이 잘 할 수 있도록 격려, 조언했다. 딸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법적 조언과 상담, 법적 절차를 진행했다. 가정상담소 소장으로 일하기 전에는 세입자 권리 및 보호를 위한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다. 하지만 주택권리센터(HRC)가 LA한인타운에 있는데도 한인들은 문제가 있는데도,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도 한인 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찾질 않았다. 한인,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졌다. 변호사이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고 상대방과 싸우는 일도 그만두고 싶어졌다.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졌다. 봉사도 좋지만 기왕이면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한인 단체에 들어가 한인들과 직접 부딪히며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마침 가정상담소가 소장을 찾고 있었다. 2009년 3월 일이다. 딸은 엄마처럼 정신과 치료를 하거나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담소의 행정적, 재정적 관리를 맡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한다. 딸은 각종 세미나를 기획한다. 그리고 엄마를 ‘이용’한다. 딸이 준비한 세미나의 강사는 엄마다. 엄마는 ‘공짜’로 나와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깨워준다. 딸에게 엄마는 ‘개척자’다. 엄마는 봉사를 말 뿐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엄마는 딸에게 커리어의 길을, 봉사의 길을, 삶의 길을 몸소 보여줬다. 딸은 엄마가 터놓은 길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간다. 딸은 엄마의 흔적을 닮고 싶다. #모녀 이야기 엄마 '봉사' 보고 성장한 딸 이젠 동료 밀어주고 당겨주며 '헌신' 할 곳 찾는다 이제 모녀는 함께다. 흔히 가정상담소 이사인 엄마가 딸이 소장으로 일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딸이 먼저 소장이 됐고 엄마를 이사로 끌어들였다. 엄마는 7~8년 만에 다시 상담소 이사로 들어왔다. 전에 엄마는 혼자 찾아 다녔다. 이제는 딸이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는다. 모녀는 그렇게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는데 재미를 부쳤다. 이재희 기자 jaeheelee@koreadaily.com

2010-12-31

[점프 업 2011 - 신년 특집] 대물림…1.5세, 2세 '젊은 그들' 대약진

한인 이민 역사는 100년을 넘겼지만 본격적인 이민은 60~70년대부터 이뤄졌다. 이 때 미국땅을 밟은 1세대 이민자들은 각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이민 1세대’로 부르는 바로 그들은 이제 비즈니스ㆍ정치ㆍ문화 등 각 분야에서 바톤을 넘겨주거나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세대교체가 이뤄진 곳도 있고, 대잇기가 한창 진행중인 분야도 많다. 한국어권이 주류를 이루던 1세대 이민자 그룹이 퇴진을 준비하면서 1.5, 2세들이 그 자리를 잇고 있다. 영어와 한국어에 두루 능통한 이들은 1세 선배들보다 훨씬 강력한 의사 소통 수단과 몸에 익힌 미국 스타일로 한인사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1세 이민자들이 한인 커뮤니티의 미약한 힘과 언어 문제로 미국 주류사회를 장벽으로 여겼다면 후배 세대들은 한인사회라는 경계를 훌쩍 뛰어 넘는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이민 2세대 그룹이 각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데는 한인사회의 외적 성장과 정치적 무게가 한층 커진 것이 큰 힘이 됐다. 그런 배경을 등에 업고 신진 세대들이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이다. 한인사회의 세대교체는 단순한 사람의 교체에 머물지 않고, 한인사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고 미 주류사회에서 한인 엘리트를 다수 양산하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하드웨어의 변화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동반되고 있는 것이다. 발전을 낳는 대물림을 이루기 위해서는 1세 선배 이민자들이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아낌없는 풀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김기정 기자

201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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